유자차행진곡

2022.06.13 썩은배추를 보고 화가 나다 본문

1000일 기도

2022.06.13 썩은배추를 보고 화가 나다

유자차행진곡 2022. 6. 13. 12:24

수행

포장지를 적게 쓰는 친환경 장보기를 해보겠다고 시장에 갔다. 대형마트나 슈퍼가 아닌 전통시장을 마음먹고 간건 처음이어서 긴장이 좀 됐다. 카드 안받으면 어쩌지? (어쩌긴 어째 현금 내야지) 농산물 상태가 안좋으면 어떻게 하지? (안사면 되지 고민도 많아)  이런 생각들로...

일단 점심시간이니 돼지국밥집에서 밥을 먹었다. 고기가 생각보다 많았지만 역시나 배를 채우는건 국이었다. 그래도 국물이 담백했고 사이드디쉬가 나오는 한국 밥상이 정겹고 좋았다. 저녁엔 밥도 건너뛰었으니 가성비도 있었다.

여튼, 고민고민을 하다가 집에 들고 온건

큰 토마토, 청경채, 깻잎, 상추, 배추, 깨강정 (남편이 좋아하는 것 같아 )

족발이나 보쌈같은 것도 사오고 싶었지만 돼지국밥을 먹어서 배가 불렀는지, 배가 부를 때만큼은 육식을 자제하고 싶어서 패스했다. 불대에서 생명존중 사상을 배우면서 채식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고기가 너무 좋아서 포기하기 힘들다.

 

농산물을 가지고 집으로 오니 힘도 들고 땀도 났다. 특히 3500원 주고 산 배추가 큼지막하고 무거워서 가장 기대가 됐다. 시어머니가 알려주신 냉동 우거지를 빨리 만들어 놓고 싶었다. 

원래는 식자재를 냉장고에 넣고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지만 마트에서 시원하게 냉장된 게 아니라 저장/보관에 고민이 됐다. 저장/보관을 잘못해서 금방 상하거나 곰팡이가 나면 식자재 값도 날라가고, 사온 수고도 날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깻잎 보관법을 검색한 뒤에 깻잎을 낱개로 풀어서 물에 담그고, 흔들어 씻고, 통을 준비에 물을 살짝 붓고, 깻잎을 탁탁 털어서 물기를 제거하고, 꼭지들을 가위로 잘라 상한 부분을 도려낸 뒤, 꼭지가 통 바닥에 물에 닿도록 세워준 뒤 저장...  이걸 하느라 시간이 꽤 많이 갔는데 그래도 오랫동안 깻잎을 먹을 수 있다 생각하니 즐거운 작업이었다.

그리고 상추랑 청경재는 신문에 싸서 냉장고 아랫칸에 넣어놨다. 키친타올을 너무 낭비하는게 싫어 신문을 처음 이용해봤는데, 신문에 잉크 냄새가 배면 어쩌나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실험삼아 해봤다.

 

그리고 대망의 배추였다. 큼직한 배추를 까만  봉지에서 꺼내는 순간.... 어 배추 꼭다리가 왜 누런 물에 젖어있지..? 그리고 풍겨오는 엄청난 악취. 배추 잎 속에서 튀어나오는 초파리.......오마이갓

겉에만 좀 상하고 속은 괜찮겠지? 해서 조심스럽게 한장 한장 잎을 벌려보는데 잎 안에서 또다른 초파리가 나온다.

잎 안쪽은 물러 있고... 세번째 잎을 벌리고, 네번째 잎을 벌리고, 일곱번째 잎 안쪽도 물러있고, 악취는 계속 난다.

ㅠㅠㅠ그동안 마트에서 장보면서 이런 일을 단 한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미치겠고 나는 배추를 즉시 내다버리려고 현관문을 열고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레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면서 끓어오르는 화를 느꼈다. 

'그 주인 (판매자) 뭐지? 이걸 알고 팔았나? 내가 가져간 봉지에 안담아주고 가게 봉지에 담아준다고 고집피울 때 설마 나한테 들킬까봐 그랬나? 친절했던 것 같은데 자기도 배추가 이런 상태라는 걸 몰랐나? 아 진짜 어이없네.....................'

요즘 수행을 해서 그런건지, 주인도 이 지경인지는 몰랐을 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배추를 버리는 길에 관리실 직원분이 오작동하는 쓰레기 기계를 살펴봐주시고 자기가 버려주겠다며 손수 나서주시는 모습에 기분이 금방 풀렸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문득 그 생각이 또 떠오르던 것, 오늘은 절을 하면서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됐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내가 꼼꼼히 살피지 않은 잘못이다.

'저 배추로 주세요' 하고 고른 거니까 내 잘못이다. 그것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잎을 한두장 열어보지 않고 냄새도 맡아보지 않고, 판매자가 알아서 좋은걸 팔겠거니 오해한 내 잘못. 꽤 크니까 한 통에 3500원이면 적은 돈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았다. 모든 결과는 나의 책임이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200원, 500원이라도 물건을 꼼꼼히 확인해보겠다.  

 

2. 세상이 내가 지불한 것만큼의 댓가를 돌려줘야 한다는 법은 없다.

댓가를 지불했으니 결과 또한 그에 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세상이 내가 지불한 것만큼의 댓가를 돌려줘야 한다'는 법은 없다. 따라서 사기치는 행위는 틀린 것도 아니고, 사기꾼이 나쁘다는 것도 진리가 아니다. 단지 오늘날 이 세상에서는 책임소재가 명확하고 그 피해가 클 때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가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을 뿐이고, 시대를 잘 만난 덕에 나는 댓과와 결과가 상응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원래는 '내가 100을 줬으니 100을 받아야 한다' 는 명제는 진리도 아니고, 그냥 내가 기대하는 바일 뿐이다. 상을 세우고 집착한 어리석음을 참회한다. 기대는 기대일 뿐이고 더 중요한 것은 실제 일어난 현상이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3. 그냥 어쩌다 썩은 배추를 골랐다.

돈주고 쓰레기를 살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럴 때도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수행이다. 살아가면서 충분히 일어날만한 사건으로 고통받을 필요도 없고, 그것을 확대/재생산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돈들여 썩은 배추를 고르고, 그걸 또 낑낑대며 집안까지 끌고 들여오는 행위도 인생의 한 조각이다. 이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면 미연에 방지하면 되고, 그럴 수 없는 경우는 '다음부터 제대로 살펴야지' 다짐하는 좋은 계기로 생각하면 된다. 나는 그동안 어물어물하면서 살아왔고, 이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게 진짜 내모습이다. 어쨌든 인생은 이렇게 어쩌다 썩은 배추를 맞이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 내가 고른 것은 썩은 배추였구나!!

 

4.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만족스러운 장을 봐왔던 것인가.

썩은 배추 한 통에 화가 났다면,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만족스러운 장을 봐왔던 것인가. 당황함을 느낀다는 자체가 평소에는 만족스러운 거래를 해왔다는 뜻이기에 이런 신뢰도를 쌓아올려준 나와 사회 구성원들에게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나는 정말 행복했구나!

 

5. 썩은 배추가 내 수행을 돕다.

배추는 배추일 뿐이지만, 배추를 통해 내 모습을 봤다. 어물어물하며 대충 고르고 값을 지불한 나를 봤으며, 돈을 냈으니 싱싱한 배추일거라고 착각한 나를 봤고, 썩은 배추를 정성껏 등에 짊어지고 집으로 가져오는 내 모습도 봤다. 그리고 과거 내가 좋은 거래를 해왔음을 봤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봤다.

 

 

 

 

보시

1000원

 

봉사